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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재 시장-약령시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09-03-29 (일) 21:32 조회 : 7192

1. 한약재 시장-약령시(藥令市)

약령시는 조선 17대 왕인 효종(재위 1650∼1659) 2년에 시작되어 일제 말엽인 1943년까지, 약 300년 간 한약재 교역을 담당하였던 특수시장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약령시는 약초를 채취하기가 쉽고 모이고 흩어지기 비교적 편리한 중심지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다. 약재가 주로 많이 생산되는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 중에서 모이고 흩어지기 편리한 대구, 원주, 전주의 3개소에서 먼저 약령시가 시작되었으며, 봄·가을 두 차례 열리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약령시가 개설되기 전에는 약재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각 산지에서 나오는 약재들이 각각 다르므로 인삼을 구하려면 금산을 찾아야 되었고, 반하를 구하려면 제주도로 가야 했다. 또한 오미자는 백두산 부근에서, 약쑥은 강화도 지역에서, 지황은 정읍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다보니 1년 중 반년은 약을 구하러 다니고, 반년은 약을 팔아야 했다. 그런 상황이니 급히 쓸 수 있는 약이 없어서 응급 환자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약령시를 형성시켰던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들을 덜기 위해서였다. 즉 약재를 쉽고 빠르게 구하기 위해 약령시가 세워진 것이다.
그 중 전주 약령시는 제주도와 지리산을 중심으로 채집되던 귀한 약재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곳으로서 대구약령시에 버금가는 큰 규모의 한약재 시장이었다. 약 1932년 11월경부터 개설되었는데 현재 약령비가 있는 곳에서 청석동 우체국 앞을 지나 매곡교에 이르는 구간에 형성되었다. 그 구간에 전국 각지에서 한약상들이 채집한 약재들을 모아놓고 매매를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간은 일년 중 음력 10월 1일에서 12월 말까지 석 달 동안 계속 되었으며 해마다 빠짐없이 개최되었다. 그 외에도 대전, 청주, 공주, 원주, 대구 등 전국적으로 약령시가 상설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풍성하였던 곳 중 하나가 바로 전주약령시였다는 기록이 있다. 전주 약령시가 그처럼 규모가 클 수 있었던 것은 제주를 비롯하여 전남·북 지방과 지리산에서 채취할 수 있는 희귀 약재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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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가지 한약재]

약령시 중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곳은 대구 약령시이다. 대구 약령시는 효종 때부터 경상 감영 내 객사 주변에서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열렸던 계절 시장이다. 이를 춘령시와 추령시라 하였는데 이렇듯 봄과 가을에만 시장이 열렸던 것은 약재들이 주로 봄과 가을에 채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국내외에 명성을 떨치며 성시를 이루었던 대구 약령시는 일제가 들어서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구 약령시가 민족 의식 앙양의 집결지라고 판단한 조선 총독부가 ‘약품 및 약품 영업취채령’, ‘의생규칙’, ‘조선한약업조합규약’, ‘조선총동원법’ 등의 여러 규칙과 법령을 시행하여 그 주체성과 자율성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1941년에 들어서는 ‘전시총동원법’을 발동시켜 결국 추령시 개설이 불허되었고 사실상 대구약령시는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광복이 된 후 한약방 경영자들인 한약업사(당시 한약종상)들이 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인 약령시를 다시 부활시키고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그 노력의 결실로 약령시가 잠시 다시 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6. 25가 발발하자 대구 약령시는 더 이상 옛날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고 속칭 ‘약전 골목’이라 하여 상설 한약방, 한의원, 한약도매상, 인삼사 등이 밀집하는 형식으로 모습이 변하였다.
그러던 중 1978년부터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구한약협회 등에서 대구약령시 부활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로 현재는 약령시보존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약령시 전시관이 설치되었다. 또한 매년 봄에는 '약초 꽃 한마당잔치', 10월에는 문화의 달 행사로 '약령제'들도 개최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구·경북 한의약 전략 산업 육성'을 위한 한의약 발전 심포지엄 등을 개최하여 대구약령시의 관광 자원 지원화 등 약령시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들이 대구광역시를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의 경동약령시는 서울특별시에서 유물 제23호로 지정한 보제원(普濟院)이 있던 곳이다. 보제원은 조선 왕조 시대에 여행자에 대한 무료 숙박과 의지할 곳 없는 병자에 대한 치료를 담당하던 구휼(救恤) 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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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동약령시 입구]

세종실록(世宗實錄)을 보면 '한성부 동서에 보제원과 홍제원(洪濟院)을 설치하여, 기민(飢民)을 돌보기 위해 건립하였다. 그러나 기민은 날로 증가하였으며, 그 중에 병자 또한 상당히 많이 발생되어 이들을 한 곳에 모아 두려니 질병의 전염과 병사가 심히 우려되어 선공감(繕工鑑)에 지시하여 별도로 원사(院舍)를 건립토록 하고 각 원사에 의원을 두어 병자를 치료하게 하였으며, 무의자(無依者)는 제용감(濟用鑑)에 지시하여 지난 사례에 의거 의복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 후 보제원(普濟院), 홍제원(洪濟院), 동활원(東活院), 서활원(西活院)에 기민(飢民)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동활원, 서활원 두 곳에 의원을 더 늘려 배치하여 병자를 치료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구휼정신은 조선 시대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민족 의약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또한 귀중한 약재를 원활히 수집하기 위하여, 1650년대(효종)부터 주요 산지이며 관찰사가 상주하는 지역(대구, 원주, 전주, 공주)에 왕명으로 약령시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민족 정기의 말살 정책, 정보의 교류 방지를 위하여 강제로 폐쇄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오늘날 전국적인 한약재의 집산지인 서울시 동대문구 경동시장(京東市場)은 유통의 편리함 때문에 1960년대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장인데, 그 일부에 한약 전문시장으로 1995년 6월 1일 서울시로부터 '경동약령시(전통한약시장)'가 지정되었다. 현재(2000년) 이곳은 전국 한약재 거래량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한약 거래 중심지로, 약 330개소의 한의원을 포함하여 930여 개의 한약 관련업소가 밀집해 있다.
이곳은, 1960년대 후반에 특화된 상품 시장으로 변모하여 1970년대 이후의 전국적인 한약재 전문 시장으로 위치를 굳혔다. 그리고 1983년부터는 인삼, 수삼, 꿀까지 취급하여 지금은 서울에서 소비되는 인삼과 꿀의 약 4분의 3과 전국 한약재 물량의 약 3분의 2가 경동시장을 통하여 유통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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