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의학서적 ①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일본의 원왕 영관 2년(우리나라 고려 성종 3년, 984)에 단파강뢰(丹波康賴)가 편술한 『의심방(醫心方)』과 그의 증손 단파아충(丹波雅忠)이 저술한 『의략초(醫略抄)』에 그 내용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으므로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백제에서 이러한 의서가 편술되었다면 백제의학이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되고 있다. ②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 일본에서 편술된 의심방의 권2 복약용의(服藥用意)와 권10 치적취방(治積聚方)에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이라 하여 복약법과 처방이 인용되어 있고, 권28의 방내용약석(房內用藥石)에서는 신라법사류관비밀요술방(新羅法師流觀秘密要術方) 또는 신라법사비미방(新羅法師秘密方)이라 하여 방중술에 관한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우선 이들 방이 동일한 방서에서 인용된 것인지, 아니면 상기한 세 종류의 책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짐작컨대 하나의 책을 세가지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복약시에 보살에게 병의 쾌유를 빌거나 노봉방(露蜂房)을 살라 먹어 정력을 돋우는 등의 내용은 정통의학에서 벗어난 내용이긴 하나 인도의 불교의학의 영향이 컸음을 말해주고 있고, 적취 치료에 있어 속수자(續隨子)에 술을 함께 쓴 것은 단방이긴 하지만 현재에도 속수자(續隨子)가 부인병의 경폐어혈(經閉瘀血), 가(痂), 벽(癖)에 쓰이는 것에 비추어 보면 실제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③ 『 어의촬요방(御醫撮要方)』 고려 고종 13년(1226)에 추밀상공(樞密相公) 최종준(崔宗峻)이 지었다. 원래 고려에 다방(茶房)에서 모은 약방(藥方)이 있었는데, 이것을 본떠서 본서를 지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까지 전해져서 향약집성방에 인용되고 있다. 현재 이규보의 서문이 『동국이상국집』권 21에 실려 있다. ④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이 책은 몽고의 침입을 받아 고려의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 대장도감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찬자가 누구인지 모르나 그 책의 이름이 특히 향약이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 향토에서 산출된 것이라는 뜻인데, 중국에서 수입되는 약재를 당재(唐材)라고 부르는데 대한 자국산 약재의 총칭이다. 이 책은 종래 많이 써오던 외국수입약재를 향약으로 대체하고자 하는데 그 의도가 있던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고려 중기의 의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시해 주고 있으며, 또 각 약초명 아래에 한자로 쓴 속명은 그 시대의 고전어 연구와 그 시대의 이두식 한자 사용법을 고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⑤ 『태산요록(胎産要錄)』 이 책은 조선시대 세종 16년(1434) 3월에 판전의감사 노중례가 찬한 것으로 상, 하 2권 1책으로 되어 있다. 상권에는 포태시의 교양법을 상세하게 논하고, 하권에서는 영아의 보호, 육성법을 구체적으로 실어 놓았다. ⑥ 『 의방류취(醫方類聚)』 의방류취는 세종 25년 경에 세종의 명에 의하여 안평대군 용 등의 감수하에 김예몽, 유성원, 민보화, 김문, 신석조, 이예, 김수온, 전순의, 최윤, 김유지 등의 문관, 의관들이 당시 우리나라에 전해 온 방서(方書)들을 유취하여 3년이 지난 세종 27년(1445) 10월에 365권으로 편수한 것이다.
그 후 실제로 간행된 권책 수는 266권 264책으로 되어 있어 편성 당시에 비하여 훨씬 정리, 축소되었다. 이것은 그 권질이 너무 방대하여 간행에 이르기까지의 교정, 정리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본서의 편집내용에 있어서는 91대강문으로 나누고 각 문에 먼저 그 문에 해당하는 병론을 들고, 다음에 약방들을 그 출전의 연대순에 따라 열거하였다. 인용된 방서들에는 한방(漢唐) 이래의 고전방서로부터 송원시대에 이르는 대표적인 주요방서들이 거의 망라되었으며, 옥기미의(玉機微義), 의경소학(醫經小學), 활인심법(活人心法), 수역신방(壽域神方) 등의 명초의 주요방서들이 함께 채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본서는 당시의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의학의 백과사전과 같다고 볼 수 있으며, 의학의 자주적 발전에 큰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⑦ 『간이벽온방(簡易?瘟方)』 조선시대 중종 19년(1524) 가을 평안도에 온역이 크게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는데, 다음해 봄까지도 유행이 그치지 않자 왕이 이것을 걱정하여 의관을 파견하고 또 약을 보냈다. 이 때 왕이 김순몽, 유영정, 박세거에게 명하여 온(瘟)에 대한 제방을 가려내어 만든 의서이다. 이 책은 한문인 원문에 언해를 붙여 중종 20년(1525)에 인출하여 반포하였다. 원간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그 중간본으로 추정되는 선조 11년(1578)의 내사기(內賜記)가 있는 을해자본과, 이 을해자본의 중간본이라 생각되는 광해군 5년(1613)의 내사기가 있는 훈련도감자본이 전해지고 있다. 전자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또 이 기해자본과 '牛馬羊猪染疫治療方'이 합철되어 있는 것으로 일본 궁내청서릉부(宮內廳書陵部) 소장본이 있으며, 후자인 훈련도감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소합향원, 십신탕(十神湯), 향소산, 승마갈근탕, 도소주(屠蘇酒), 형광환(螢光丸), 호두살귀원(虎頭殺鬼元), 신명산(神明散) 등의 효능, 조제방법 및 복용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⑧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이 책은 조선시대 인조 22년(1544)에 허임이 찬한 침구에 관한 전문의서로 1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호남관찰사 목성선에게 허임이 부탁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허임이 그의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진단법, 보사법을 논하고 취혈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자기가 경험한 요혈을 질병명, 증상 등에 따라 분류하여 기록하고 있다. ⑨ 『의림촬요(醫林撮要)』 이 책은 조선시대 명종 및 선조 때(1567년 경) 내의 양예수가 의학정전을 기본으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13권 13책으로 되어 있다. 동의보감의 서문에 의하면 선조가 유의인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등에게 완비된 의서의 편찬을 명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 책이 동의보감의 편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본서와 『동의보감』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질병의 증상이나 논설이 유사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선별해 놓은 처방에도 같은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서는 『동의보감』의 남본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동의보감』의 편찬에 대한 정경선, 양예수의 공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내용을 동의보감과 비교해 보면 본서는 식치법과 우리나라 고유의 구급방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⑩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이 책은 조선시대 선조 41년(1608)에 허준이 편찬한 부인과에 속한 태산과 태아보호에 관한 의서로서 1책으로 되어 있고 각 항목마다 언해되어 있다. 임진란 전에 『태산집』이라는 책이 있었으나 난 중에 소실되었으므로 허준이 다시 지었다.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동의보감』의 '부인문'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로 인용한 의서는 『의학입문』과 『의학정전』이다. ⑪『동의보감(東醫寶鑑)』 이 책은 선조 29년(1596)에 태의 허준이 왕명을 받아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등과 함께 局을 설치하고 편찬을 시작하여 광해군 2년(1610)에 내의원에서 간행한 의서이다. 모두 25권 25책으로 되어 있다.
선조가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할 것을 명하자 허준이 왕명을 받들어 이 사업에 종사하였으나, 정유왜란으로 여러 의가들이 흩어졌기에 한 때 편찬사업이 중지되었다. 난이 끝난 다음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동의보감의 편찬을 명하고 내장방서 500여 권을 자료로 내어주어 편찬이 계속되었다. 허준은 이에 전력을 다했으나 편집이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을 때 선조는 승하하였고, 이어 등극한 광해군 2년(1610)에 이르러 15년간의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본서는 세종 때에 편찬된 향약집성방에 비하여 그 편제가 매우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내경』을 근간으로 하고 중국의 금원대 의학을 대폭 수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금원대의 의학에서도 특히 이동원, 주단계의 의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이 두사람의 의학사상은 질병의 원인을 사람의 밖에서 찾지 않고 바로 사람 안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즉 질병을 사람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으므로 동의보감은 그 체계가 다른 책과는 달리 앞부분에 먼저 내경편, 외형편 등으로 인체에 관하여 논술하고 그 보양법과 치료법을 밝히고 있다. 편찬내용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의 5대강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강에 류에 따라 항을 나열하였으며, 각 항목의 다음에는 그 항에 해당하는 병론과 방론을 빠짐없이 채록하고 또 출전을 밝혀 놓았는데, 각 병증에 대한 고금의 치방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하였고, 곳에 따라서는 속방이나 자신의 경험방을 쓰기도 하였다.
⑫ 『벽온신방(酸瘟新方)』 이 책은 조선시대 광해군 5년(1613)에 허준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것으로, 그 해 12월에 내의원에서 간행되었다. 당시에 유행하였던 당독역(唐毒疫)에 대하여 그 증상, 변증, 치법, 예방 등을 논하고 아울러 처방을 붙여 놓은 책이다. 당독역(唐毒疫)이란 독역형증의 항을 보면 갑자기 발열, 두통신동이 있고 전신에 붉은 발진이 생기고 정신이 혼미하고 헛소리를 하며 인후가 종통하고 폐색된다 하였으므로 성홍열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인용서목은 『내경』, 『동의보감』, 『상한론』, 『의학입문』 등이다. ⑬ 『급유방(及幼方)』 이 책은 조선시대 숙종 15년(1689)에 조정준이 저술한 우리 나라 최초의 소아과 전문의서로서 인본은 전해지지 않고 필사본 13권 6책이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의학입문』, 『소아약증직결』 등을 인용하여 편찬한 것이나 자신의 의견을 많이 도입하고, 또 스스로 경험한 실례를 들어 놓았으므로 독창적인 내용이 많다. 본서는 단순히 증상을 나열하고 처방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병인과 병리를 밝히고 있어 변증논치의 정신이 잘 반영되어 있다. ⑭ 『양의미(瘍醫微)』 이 책은 조선시대 순조 때의 명의 이의춘(李宜春)이 쓰던 비방 수십개에 헌종 2년(1836)에 후학 신기영(申耆永)이 새로 옛날에 들었던 것을 수집하고 신방을 붙여서 만든 옹저(癰疽)에 대한 전문의서로 사본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현재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옹저의 치료법을 계통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당시의 치종법(治腫法)의 대요를 알 수 있는 책이다. ⑮ 『의문보감(醫門寶鑑)』 이 책은 조선시대 경종 4년(1724)에 주명신이 편저한 것을 고종 때의 내의 이명석이 교정하여 1918년에 서울 동서관(東書館)에서 납활자로 간행한 것으로 8권 1책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병증을 124문으로 나누고 각 병증을 중심으로 하여 각 병문을 들고, 그 병문에 해당하는 병원과 병인을 논하고, 다음에 치법과 용약을 쓰고 고금명의 및 자기의 경험 예를 그 끝에 붙여서 초학의라도 병증에 따라 방약을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이 책은 조선시대 고종 31년(1894)에 동무 이제마가 저술한 것으로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이제마는 고종 30년(1893)에 이 책의 저술에 착수하여 『동의수세보원』상·하 3권을 완성함으로써 사상의설을 제창하였다.
그는 고향인 함흥에서 의업에 종사하면서 광무 4년(1900)에 다시 이 책에 성명론부터 태음인론까지를 더하였으나, 태양인 이하의 3편을 미쳐 끝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그 다음 해인 광무 5년(1901) 6월 함흥에서 그의 문하생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서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을 그 체질에 따라서 4가지 형(型) 즉 사상(太陽, 少陰, 少陽, 太陰)으로 나누고, 모든 사람은 이 사상의 어느 한 가지에 속하므로 그 체질에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같은 이름을 가진 질병이라 하더라도 치료법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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