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 임금의 종기를 치료한 의원 피재길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전해오는 일화로, 의원 피재길의 이야기이다.
피재길은 의원 집안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종기 치료를 전문으로 했는데, 약을 잘 배합해 썼다.
아버지가 세상을 떴을 때, 재길은 아직 어려서 아버지의 의술을 전해 받지 못했으므로, 어머니가 듣고 보았던 여러 처방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재길은 의서를 읽은 적은 없고, 다만 약재를 모아 고약을 고는 법만 알 뿐이었다. 그는 별별 종기에 쓰이는 고약을 팔아 생활을 하며 마을을 돌아다녔으므로 감히 의원의 축에 끼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소문을 듣고 불러다 그의 고약을 써보면 자못 효험이 있었다.
계축년(1793년) 여름 정조(正祖)께서 머리에 작은 부스럼이 나 침도 쓰고 약도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었고 종기는 얼굴과 턱 등 여러 부위로 점점 번져나갔다. 때는 마침 한여름이라 임금의 일상 생활이 편할 수가 없었다. 내의(內醫)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조정 신하들은 날마다 모여서 고민하였다. 그런데 재길을 아는 사람이 있어 불러들이라 명하여 증세를 물어보았다. 재길은 지체가 비천한 탓에 벌벌 떨고 땀을 쏟으며 대답을 하지 못하니, 좌우의 내의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께서 재길에게 가까이 와서 진찰하게 하시었다.
"두려워하지 말고 네 의술을 다 발휘해 보도록 하라."
"신에게 한 가지 써볼 만한 처방이 있습니다."
물러가서 약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하자, 곧 웅담(熊膽)을 여러 약재와 배합해 고아서 만들어 환부에 붙였다. 정조께서 며칠이면 낫겠느냐 하문하시자, 재길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루면 통증이 가라앉고 사흘이 지나면 나을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재길의 말과 같았다. 정조께서 약원(藥院)에 명하셨다.
"약을 붙이고 조금 지나자 전날의 통증을 씻은 듯 잊었으니, 지금 세상에 숨은 기술과 비방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의원은 명의라 할 만하고 약은 신방(神方)이라 할 만하다. 그의 노고에 보답할 방도를 상의하도록 하라"
내의원의 신하들이 먼저 내의원의 침의(鍼醫)에 차정(差定)하고, 6품의 품계를 내려 정직(正職)을 제수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정조께서 그대로 허락하셨다.
곧 나주감목관(羅州監牧官)을 제수하자, 내의원의 의원들이 모두 놀라고 탄복하였다. 이에 재길의 이름이 온 나라에 알려졌고 웅담고(熊膽膏)는 마침내 천금가는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하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