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한의사협회(이하 한의협) 집행부가 한의사, 의사 간 교차교육을 통한 ‘통합의사’ 양성 논의를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기면허자를 위한 경과조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전회원 투표가 무의미하다는 회원들의 반대 목소리를 전격 수용한 것이다. 다만 한의계는 한의대의 현대의학 교육 강화와 한의사의 면허 범위 확대라는 큰 틀에서의 정책 방향에는 공감대를 확인하며, 기 면허자에 대한 구체적인 경과조치 확보 등 충분한 숙의와 토론을 통해 향후 정책 추진 방향을 정해 나가기로 했다. 본란에서는 그간의 진행 상황을 정리해 봤다.
◇국회 간담회서 쏘아올린 신호탄
한의협이 통합의사와 관련된 신호탄을 쏘아올린 건 지난 6일 열린 ‘한의사와 한의과대학을 활용한 의사인력 확충 방안 국회 간담회’에서다. 의료일원화를 전제로 한의대생이 의학 수업을 들으면 한의사와 의사 두 개의 면허를 취득하도록 하고, 통합교육을 이수한 한의사를 지역·공공의료 인력으로 활용하자는 게 골자다.
이어 12일 최혁용 회장은 대회원 담화문을 통해 ‘기존 면허자에 대한 경과조치 마련을 전제로 한의학?의학 통합교육을 이수한 한의사를 지역?공공의료 의사 인력으로 활용하는 정책 추진에 대한 찬/반 투표’를 발의했다. 그리고 같은 날 김경호 부회장은 한의협 유튜브 채널 ‘한방에산다’ 라이브 방송에 출연해 회원들이 우려하는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핵심은 최근 정부가 꺼내든 의료인력 재편 논의에 한의사도 참여해 역할 영역을 넓히려는데 정책 추진의 목적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전회원투표 추진이 ‘갑작스럽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코로나19로 인해 대의원총회를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부 의견을 모으기 위해 회원의 뜻을 불가피하게 묻기로 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협회에 힘 보탠 한의대학장협
협회의 통합의사 정책 추진 의지에 힘을 실어준건 학장단이었다. 전국 한의과대학장·한의학전문대학원장 협의회(이하 협의회)는 지난 13일 “현재 배출되고 있는 한의사는 국민건강을 위한 의료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역 간 갈등으로 질병 진단을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현대 의료 진단 및 치료기기 사용이 제한되고 있다”며 “통합의대로의 전환을 통해 양쪽 면허를 취득한 통합의료인을 배출함으로써 양질의 질병 진단은 물론 치료를 통해 국민건강 증진에 더욱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입장을 전했다. 1~2년 추가교육 등 학제개편을 통해 양쪽면허를 취득하는 통합의대로 전환함으로써 코로나19로 부각된 ‘의료인력 확’충이라는 정부정책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논리다.
◇대의원들 “학제통합 중단” 회원투표 촉구
그러나 기면허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장 대의원단이 나섰다. 대의원들은 “기면허자의 경과조치가 선결되지 않은 집행부의 학제통합 및 변경 추진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회원투표 실시를 요구했고, 해당 내용으로 14일 대의원들이 서면결의를 진행했다. 결과는 재적대의원 250명 중 197명이 표결에 참여해 찬성 160명(81%), 반대 34명(17%), 무효 3명이었다.
대의원단은 “코로나로 대면 회의가 곤란한 상황에서 학제의 변화 등이 가져오게 될 엄청난 후폭풍과 기면허자들의 상대적 피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일방적으로 학제변화를 꾀하는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며 “기존 면허권자들에 대한 경과조치가 구체적으로 담보된 이후에 추진하라는 취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부, 분회 “충분한 논의 없어 분열 가중”
반대 목소리는 12곳의 시도한의사협의회장을 시작으로 시도지부로도 번지기 시작했다. 서울시한의사회는 17일 '경과조치의 세부내용 선결없는 통합의대 추진을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한의협 중앙회가 회원 투표 전에 회원들에게 경과조치의 내용이나 실현 가능성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회원 투표를 서둘러 진행하는 것은 회원들의 대리인으로서의 의무를 심각하게 저버린 것”이라며 “회원투표를 즉각 중단하고 공식 발언 전에 주변 임원들과 원로들의 의견을 청취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충남한의사회는 18일 “통합의대안은 한의사의 정체성과 한의사의 권익을 보장 받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수면허자만을 양산하는 졸안”이라고 지적했다. 의사의 면허권까지 동시에 부여하는 것은 양의사의 권리를 행사하게 하는 것일 뿐 한의사의 위상변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한의사에게 오히려 상당한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분회차원의 성명 발표도 있었다. 양천구한의사회는 회원투표안을 두고 “백년지대계인 교육방안을 졸속으로 처리해 한의대 학제를 바꾸고 양방의대와의 학제교류 내지 통합방안을 추진하려는 것”이라며 “전문가들의 논의도 없이, 집행진 단독으로 일방적인 주장만을 강요하면서 일반회원을 대상으로 치르는 투표는 매우 불합리하고 투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수원시한의사회는 “전회원 투표가 안건에 대한 명확하고 충분한 설명과 사전 논의 없이 성급하게 진행된다면 한의계에 더욱 큰 혼란과 분열을 가중시킬 수 있어 중앙회는 조건을 불문하고 현재 추진 중인 전회원 투표를 즉각 중단하라”며 “경기도한의사회는 시도지부장 성명서에서 밝힌 입장대로 시도지부장들의 충분한 논의와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중앙회의 전회원투표가 중단되도록 실제적인 방안을 강구하고 즉각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촉구했다.
◇한의협 명예회장들 가세…사퇴 압박도
한의계 원로들도 거들고 나섰다. 11명의 한의협 명예회장들은 “집행부가 난데없는 한양방 의료일원화로 한의사 제도를 없애려 하고 있다”며 “최혁용 회장을 비롯해 한의대학장들까지 모두 사퇴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들은 “통합의대가 되지 않으면 한의학 교육혁신이 될 수 없고 양질의 의료인력 확충에 기여 할 수 없는 것처럼 주장한 것은 양질의 의학교육으로 국민 건강에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는 학장과 교수들이 책무를 저버린 것”이라며 “한의학의 현대화는 정책적 개선만으로도 이뤄질 수 있고 한의학과 한의사 제도 말살을 획책하는 통합의사의 추진 명분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